시인의 방

저러다간 오래 못가지/박가월

egg016 2008. 10. 15. 16:14

 

저러다간 오래 못 가지

 

1

꽃이 피었다지만 철모르는 꽃이지

아직 입춘도 오지 않았는데

한 엿새 봄 날씨 같다고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지조 없는 개나리가

화냥년 가랭이 벌려 주듯

아무 데서나 피어나면

처녀들 가슴만 설레다가 상하지

반딧불을 봐야 별을 대적한다지만

달 밝은 밤이 흐린 날만 못하지

영하로 떨어지기만 해봐

언제 피었냐는 듯 힘 못 쓰고

쏙 들어가고 말지

저러다간 오래 못 가지

 

 2

메뚜기도 오뉴월이 한철이라고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지

만나면 사랑한다 해놓고

오늘은 이 여자 내일은 저 여자

여자가 한둘이 아니여

내가 알고 있는 여자만도 다섯이여

양다리 걸치는 것도 한둘이지

비용이야 남자가 잘 났은께

여자 측에서 낸다고 치고

시간을 어떻게 쪼개서 만나는지 모르겠어

저러다가 전성기 다 놓치고

이상한 여자 델고 살드라고

여자가 눈치채면 기분 좋겠어

이 여자 저 여자 재고 있는 데

알면 기분 잡쳐서 단념하지

나 같아도 미련 없이 떠나지

저러다간 오래 못 가지

 

 3

죽자 사자 쫓아다닌다고

일방적으로 혼자 좋아하면 쓰남

맴이야 자유니께 뭐라고는 못하는디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지만

상대가 꼴두 보기 싫다는데

수백 번을 찍은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거지

소용 있겠어 제풀에 꺾이겠지

염불을 해도 소귀에 경읽기인디

죽쒀서 남 좋은 일 시키는 것도 아니고

당사자가 멀리하는데

약장수 뒷북치다 말 겄지

염려 붙들어 매놓소

그 집 사위는 안 될 것잉께

구술도 꿰어야 보배라는데

언제까지 그리 쫓아 다니건남

저러다간 오래 못 가지

 

 4

열길 물 속 깊은 건 알아도

사람 마음속은 모르는 것이여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 하지 안남

며느리를 철썩 같이 믿는 데

웃음 속에 칼을 들이댄다고

비수를 품고 있네 그려

언젠가는 들통나는 법이여

후회하는 날이 올 것이구먼

시부모를 속이고 언제까지 가건남

피눈물도 없는 며느리구먼

죽은 자식만 불쌍하지

시부모나 살게 놔두지 돈을 빼돌려

저렇게 하면 죄받는 법인디

그 돈은 어디다 썼는지야

그것이야 모르지 서방을 얻는데 썼는지

서방질을 하는데 썼는지

본인이 잘 알 것이고

저러다간 오래 못 가지

 

 5

도와주는 것도 어느 정도이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지

있을 때 아껴 쓰고

필요할 때 손을 내밀어야지

눈치코치 없이 아무 때나

손을 내밀면 쓰것남

말 한마디에 천냥 빚을 갚는다는디

서방한테 말하면 안도와 주건남

소 잃고 외양간 뜯어 내지 않건남

청천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질 것이고만

같이 만들어 낸 딸도 아니고

데리고 온 딸자식인데

딸년이 손내민다고 서방 몰래

몇 번을 빚 얻어 주면 같이 망하는 것이여

우선 달다고 곶감 빼먹듯

힘 안 들이고 살림하는 것이 온전하건남

저러다간 오래 못 가지

 

 6

바람이 불어야 배가 간다고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건남

외간 남자하고 여관엘 들어가는 것을 봤대

남편이 고생해서 돈 벌어다 주면

애들하고 살림이나 오순도순 할 일이지

남편이 출근하기 무섭게 정장을 차려입고

카바레에 나간다잖아

칼로 물 베기라지만 부부는 남이랑께

그런 곳에 들락거리는데

남자들이 가만히 있겠어

밑져 봤자 본전인께 말 한마디 던져 보고

반응이 있으면 춤추자 겄지

그러다 술 먹자 커피 먹자

자연스레 만나는 거지 나도

누가 술 사 준다면 갈 맴이 있는디

우선 꽁자니께

남편이 눈치채고 미행한다는 소문이여

붙잡히면 끝장이 나겄지

갈라지던가 집에 처백혀 살던가

양단간에 결정이 나는거 아니여

저러다간 오래 못 가지

 

 7

안 되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저런 인간을 그냥 놔두니

세상에 저런 일이 있어 세상 말세지

제 어미가 행상해서 근근히 목구멍에

풀칠하고 사는데 돈은 벌어다는 못 줄망정

홀딱 빼앗아 가 버려 죄받아 죽지

동네에 후레아들 하나씩은 있다더니만

한 푼 모디겨 놓으면 어떻게 알고

귀신같이 뺏는 거야, 안 주면 욕하고

때리려고 하니 안 주고 못 배기지

까마귀만도 못한 개망나니지

자기가 기른 개에 발꿈치 물린다더니

제 어미 피눈물 나게 해놓고

죄받지 천벌을 받지 천벌을

무슨 벼락이 떨어져도 떨어질 것이구먼

저러다간 오래 못 가지.

 

 

 

[월간 문학21 발표 2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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