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방

장날 반 보기/박가월

egg016 2008. 8. 13. 14:08

 

 

 장날 반 보기

 

               박가월

1

 

사오십 리

먼길도 아닌데

불현듯 친정 식구가

삼삼하여 해가 중천에 올라

콩 한 말 이고

나들이옷 휘저으며

나선 이십오릿길 오일장.

 

2

 

원앙골에서 살다 어물전을 낸

산동 작은 이서방네 가게는

언제부턴가 스스럼없이

장에 가면 쉬었다 만나서 오는

원앙골 사람들의 만남의 장소가 되었다

후덕골로 시집간 고서방네 큰딸이

어릴 적부터 어머니 손잡고

장에 가면 드나들어 익히 알고 지내는

어물전 주인에게 인사하고

원앙골에서 누가 오면

나 좀 보고 가라고 전하고는

싸전에 들러 콩을 내고 장을 보고서

부지런히 어물전을 찾아왔다

원앙골에서 장에 나온 웃아래집 살던

순임이 어머니를 반갑게 맞으니

“이게 누구여, 고서방 큰딸 아녀!

아이고 얼굴이 거칠고 야위었구먼

시집에 무슨 일이 있는감?”

친정 어머니만큼이나 걱정을 한다

“없구만유, 우리집은 편안한 감유,

부모 동생들은 잘 있는 감유?”

다 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며

오늘 집에서 장에 온 사람이 없다고

걱정이 되면 엎어지면 코 닿을 데

새벽같이 장에 들려 다녀가라고

순임이 어머니는 안쓰러워 얘기하지만

친정에 가서 하루도 묵지 않고

쪼르르 가서 부모님을 뵐 처지도 아니라

다음에 시간을 내서 찾아뵙는다 하고

동생들 눈깔사탕을 사 보내며

“다음 오일장에 어머니를 꼭 좀

뵈었으면 한다고 전해 주세유.”

“알았구먼 내가 즉시 전해 주겠구먼.”

이렇게라도 만남을 기약하고

집으로 걸음을 재촉하니

서산에 뉘엿뉘엿 해가 저문다.

 

3

 

장에서 돌아온 순임이 어머니는

고서방네 사립문을 넘어 보며

큰딸을 장에서 보고 왔다고

눈깔사탕 봉지를 건네주면서

얼굴 꼴이 말이 아니라고

일이 있는지 서방이 속을 썩이는지

친정 엄마를 뵙고 싶어 한다고

안쓰러워 못 보겠다고 조금 과장 섞인

말로 있던 일을 사실대로 얘기하니

고서방은 담뱃대를 물고

마루에서 묵묵히 듣고만 있고

친정어머니는 걱정이 되어

큰딸에게 무슨 일이 있나

단 걸음에 달려가고 싶지만 오가면

하루는 꼬박 걸리는 길이라

사돈댁도 있고 무작정 가 볼 수 없어

들은 얘기를 물어 보고 또 물어 보고

큰딸이 왜 보자고 하나

장날이 오기를 걱정스레 기다려진다.

 

4

 

무슨 일이 있는 감 싶어

촌에서 돈 되는 거라야

무거우면서 마땅히 없지만

닭 한 마리를 붙들고

쌀 두 말을 이고 막내딸을 데리고

보약이라도 해 줘야지 하고

아침부터 장길을 서두른다

너무 일찍 서둘러 장에 온 터라

쌀을 내고 닭을 팔고 딸을 기다린다

어물전 주인은 딸이 다녀가더니

나왔느냐고 인사를 하고

얼마를 기다려 서둘러 온 큰딸은

어머니와 동생을 만나니 눈물이 핑돈다

장터에서 국수 한 그릇씩을 먹으면서

어머니는 딸 동정을 살핀다

“엄마는 왜 보자 했냐, 무슨 일이 있냐?”

보자 하니 얼굴도 핼쑥하고

걱정이 되어 꼬치꼬치 캐묻는다

말을 한들 무슨 소용 있으랴

어머니 얼굴이나 보고 가면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 것 같아

나온 걸음이라 큰딸은 아무 일 없다고

어머니가 보고 싶어 보자고 했다며

고생스러움을 숨긴다. 숨긴다고

얼굴에 나타나는 것을 모르는 척 할 수 없어

어머니의 파란만장한 세월의

인생 경험담을 얘기해 주니

“사는 게 힘드니 어�가 보고 싶구만유

어�를 보면 맺힌 마음이

풀릴 것 같아 보자구 했구만유.”

“그래 엄마도 그랬다. 없는 집에 가서 살면

마음 고생을 해야 한다. 꾹 참고

살아가다 보면 복 받을 날이 올 것이다.”

열심히 살아 달라고 당부하고

엄마가 보고 싶거든 언제든지 연락하라며

아이들 옷가지와 과자 봉달이

어른들 끓여 드리라고

고기 근이나 사서 들려 보내니

어머니는 마음이 놓이고

딸은 어머니를 보니 위로가 되어

집으로 돌아서는 발걸음은 한결 가벼웠다.

 

 

 

[월간 문학세계 발표 2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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