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방

주안역에서/박가월

egg016 2008. 9. 29. 07:25


 

주안역에서


떠나 버린 사랑을 치유하기 위해

숱한 이야기를 나누던 주안역 광장을 찾는다

공중전화기에 매달려

통화하는 사람들은 제각기 이유가 있다

숙녀는 애인과 어느 장소에서

만나자는 전화를 하고 유유히 사라지는데

그 옆 여인은 실연인 양 눈물을 글썽이며 돌아선다

신사는 골똘히 무슨 생각에 잠겨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전화를 걸고,

청년은 참다못해 휴대폰을 박살낼 것처럼

큰소리로 친구한테 욕설을 퍼붓는다

아저씨는 환하게 웃으면서 어느 갈비집 앞으로

아내와 아이들을 나오라고

여유가 있는 행복한 얼굴로 통화를 한다

전동차는 와서 사람을 부리고

역 광장에서는 가족, 연인 또는 친구들을 만나서

다정한 이야기를 나누는데

나는 공중전화기를 바라보며 그녀를 생각한다

서로 잘못도 없이 헤어져 소식을 전하지 못하는

그리움을 어떻게 설명할까

주안역 광장에는

내 경험을 연기하는 사람들처럼

다양한 희로애락을 연출하는 모습으로 돌아들 선다

전동차는 오고가고 만나서 돌아가는데

나는 만날 약속도 없고

전화 통화도 없는 그리운 사람을 기다린다

그리고 낮게 불러 본다.

 


 

[시와 에세이  20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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